1년 전쯤 친한 동료 선생님이 생일 선물로 문학동네 북클럽에 가입시켜 주신 적이 있다.(올해는 때를 놓쳐서 재가입을 하지 못했는데... 내년에는 꼭 다시 가입해야지) 북클럽 회원 혜택으로 원하는 책 2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 내가 고른 책 중 하나가 <일곱 해의 마지막>이었다. 많은 책들 중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별거 없었다. 그냥 유명한 작가의 신작 소설이니 재미있겠지 하는 단순한 마음이었다.
그러고서 이 책을 책장에 올려둔 채로 거의 1년이 흘렀다.
다시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문학잡지 Littor를 읽다가 이 책에 대한 언급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김연수 작가의 인터뷰 내용 안에서 이 책의 제목을 찾고서, 음 나중에 읽어봐야지~ 했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에 와서 책장을 뒤졌고, 유레카! 이 책을 발견했다. 와! 이건 운명이다 싶어서 냉큼 책을 펴고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의 배경지식은 딱 하나였다. 백석 시인이 북으로 간 이후의 이야기를 작가적 상상력으로 서술한 책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책이 술술 읽히지는 않았다. 일단 소설의 전개 방식에 있어서 소챕터별로 초점이 되는 인물이 달랐기에, 이 인물들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고민하면서 읽어야 해서 시간이 좀 걸렸다. 또한 아무래도 북한 사회에서 백석 시인이 어떻게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내용도 비중 있게 다루어졌기에 북한의 정치 체제와 관련된 용어들이 다수 등장했다. 그것들이 나에겐 다소 낯설었다. 그래서일까, 한 자리에서 집중해서 쭉 읽지 못하고 중간중간 쉬면서 천천히 읽어나간 것 같다.
작품을 읽으면서 ‘기행’이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을 오롯이 표현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검열당하는 처지가 안타까웠다. 표현의 자유와 거주의 자유를 박탈당한 예술가의 처지를 명확하게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결국에는 삶을 견뎌내고 살아가는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준도 일본어로 대꾸했다.
“외로움을 나쁜 것이라고만 생각하니까 그럴 수밖에. 외로워봐야 육친의 따스함을 아는 법인데, 이 사회는 늘 기쁘고 즐겁고 벅찬 상태만 노래하라고 하지. 그게 아니면 분노하고 증오하고 저주해야 하고. 어쨌든 늘 조증의 상태로 지내야만 하니 외로움이 뭔지 고독이 뭔지 알지 못하겠지. 요전번에는 종로의 한 화랑에서 그림을 봤는데, 무슨 제철소인가 어딘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그려놓았더군. 그런데 육중한 철근을 멘 노동자들이 모두 웃고 있더라구.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 슬픔을 모르는 인간, 고독할 겨를이 없는 인간, 그게 바로 당이 원하는 새로운 사회주의 인간형인가봐. 그러니 나도 웃을 수밖에.”(p.30)
->통념적으로 부정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고통, 슬픔, 고독이 실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소중한 자극과 감정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것을 간과한 사회주의 체제에서 기행이 시인으로서 살아가기에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도 체감할 수 있었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p.85)
->문장이 뭔가 철학적이고 곱씹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듯하여 적어둔다.
생각에 잠긴 기행에게 벨라가 말했다.
“그리고 이제 그 상을 더 이상 스탈린상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소련연방상으로 이름을 바꿨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아무리 혹독한 시절이라도 언젠가는 끝이 납니다. 사전에서 ‘세상’의 뜻풀이는 이렇게 고쳐야 해요. 영원한 것은 없는 곳이라고.”(p.117)
->세상은 영원한 것은 없는 곳이다.. 이 공간에서 기행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리고 독자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질문하는 심오한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은?”
현이 화제를 바꿨다.
“시집 제목? 저문 6월의 수선이라고 할까봐.”
기행의 대답에 현이 눈을 치켜떴다.
“수선? 저문 6월의 수선?”(p.181)
->이 부분이 너무나 반가웠다. 왜냐, 2023학년도 9월 모의평가에서 백석의 수필 <편지>가 나왔는데, 그때 ‘수선’이라는 단어가 나왔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을 ‘수선’에 빗대어 표현하는 그 구절이 팍 떠오르면서, 백석 작품의 특징을 내가 상호텍스트적으로 파악했다는 생각이 들어 홀로 뿌듯했다.ㅎㅎㅎ

강쇠바람이 독골 깊은 골짜기를 가을빛으로 물들이면, 남쪽으로 트인 하늘로는 진청의 허공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졌다. 그 하늘 아래로 아직은 초록인 무와 배추, 누렇게 영근 조와 귀리, 땅을 뚫고 올라온 불꽃처럼 군데군데 자리잡은 단풍이 색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호주머니를 털어 마지막 사치를 부리는 탕아처럼 떠나는 계절은 본래 색보다 더 많은 듯이 느껴지게 온 산하를 넘치도록 물들였다. 그러다가 끄무레한 하늘이 며칠 이어지면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바뀌었고 이내 성엣장이 실려오는 강물로 눈발이 죽죽 그어졌다. 늦지 않게 가을걷이와 마당질을 끝낸 사람들은 귀틀집 방 벽에 백토 칠을 하고 구들돌을 손질한 뒤, 새 창호지를 문에 발랐다. 관평리의 기나긴 겨울은 그렇게 시작됐다.(p.227)
아무리 준비해도 모자란 겨울나기에 비하자면, 봄 준비는 마냥 기다리는 게 일이었다. 봄은 아기 걸음이고, 먼빛이고, 올동말동이니까. 4월 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사흘이 지나면 강에서는 쩍쩍 소리 내며 버그러지는 얼음장 위로 흙탕물이 넘실거렸다. 새벽이면 골짜기 안으로 안개가 부잇하게 감돌아 돈사(豚舍) 네모 등의 가스불빛이 까물거렸고 아침햇살이 빗살처럼 번져나면 새들의 노랫소리가 흥겨웠다. 겨우내 얼어 있던 흙으로 틈이 생겨 봄볕이 스며들면 오랑캐꽃과 살구꽃과 진달래가 피어나 단조롭던 흑백의 구릉을 환한 빛으로 물들였다.(p.228)
->김연수 작가의 산문적 묘사가 매우 마음에 들기도 했다. 기행이 나이든 후 삶을 살아갔던 ‘삼수’라는 오지의 겨울과 봄의 도래를 너무나 아름답게 표현해서, 도시에서만 살아온 나는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이걸 내가 상상력으로 떠올릴 수 없다는 것이 통탄스러울 정도...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렇게 아름다운 묘사를 할 수 있지?????
고백하자면 읽으면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었다. 왜냐하면, 이 책에 담긴 인물의 고민과 삶의 궤적을 이해하기에는 내가 아직 어리고 미성숙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5년 뒤에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지금보다 더 집중하고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을 듯하다.
더불어, 나중에 백석 시인 작품으로 수업을 진행하게 될 경우 참고 자료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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