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 들어 2학년 전체 반의 교과창체 수업을 맡게 되었다. 교과창체(창의적 체험활동)의 경우 정기고사를 보지 않고 수행평가도 실시하지 않는지라 학생들의 수업참여를 이끌어내기 어렵다. 게다가 나의 경우 현재 2학년 학생들과 수업을 한 적이 한 번도 없기에, 학생들과 라포 형성도 되어 있지 않았다. 실제로 2학기 첫 수업 때 한 반에 들어갔는데, 몇몇 학생들이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눈으로 스캔하며 경계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학생들에게 각종 활동형 수업을 하자고 밀어붙인다면 학생들이 수업에 비협조적으로 반응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자습만 줄 순 없는 노릇. 무언가를 해야 했다. 학생들의 반발심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수업 내용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모둠활동을 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므로 모둠으로 진행되는 수업은 일단 패스. 머리를 많이 쓰고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프로젝트형 수업도 애들이 성적 안 나온다고 등한시할 것이 자명하므로 이런 수업도 패스. 그럼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 거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머리를 열심히 굴리면서 생각했다. '교과'창체 시간이므로 내 전공인 '국어'와 관련된 간단한 활동을 해야겠다고. 그런데 요즘 애들이 숏폼이나 SNS의 각종 짧은 글에만 익숙해서 어떠한 주제를 담은 비문학 글을 끈기있게 읽지 못하는 편이라고? 그렇다면, 교과창체 시간만큼이라도 3~4쪽 되는 줄글을 읽고 내용 확인 문제, 자신의 생각을 적어보는 문제를 풀게 만들면 어떨까? 이러한 생각의 흐름 끝에 만든 것이 '비문학 읽고 질문에 답해보기' 활동이다.
학생들에게 첫 시간에 이렇게 말했다. "여러 가지 과목을 공부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교과창체 시간만큼은 여러분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활동은 희망자만 하면 됩니다. 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학생들은 조용히 자습을 하세요. 희망자들은 선생님이 매 시간 나누어주는 비문학 글을 꼼꼼히 읽고 질문지에 답을 달아 제출하면 됩니다. 성실하게 답변한 학생들의 경우 추후 생활기록부에 해당 내용을 기록해 주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각 반별로 3분의 1에서 2분의 1 정도의 학생들이 활동지를 작성해서 제출하였다.
글의 주제와 난이도가 학생들 관심사와 수준에 적절한지를 고려하여 비문학 글을 선정했다. 각 활동지에 넣은 비문학 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제1: 환경 보호> 호프 자런,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김영사, 2020
<주제2: 언어 속 이데올로기> 신지영, 『언어의 줄다리기 : 언어 속 숨은 이데올로기 톺아보기』, 21세기북스, 2018
<주제3: 웃음과 철학> 이진민, 『웃음의 명암: 철학자들은 웃음을 어떻게 바라볼까?』, 2022 고교 독서평설 4월호, 74~81쪽.
<주제4: 기억과 과학> 『강양구, 모든 것을 기억하면 행복할까?』, 2022 고교 독서평설 8월호, 140~147쪽.
각 주제별 글 내용 뒤에 질문지를 제작하여 학생들에게 제공했다. 내용 이해를 확인하는 OX퀴즈,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는 문항을 제시하여 학생들이 자신의 독해력과 사고력을 점검할 수 있게 했다.
이중 <주제4: 기억과 과학> 활동지에 학생들이 단 답변을 공유한다.
11.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은 무엇인가?
친구들과 함께 한강에 가 돗자리를 펴놓고 불꽃축제를 감상했던 가을밤.
작년에 방탄소년단 콘서트를 간 적이 있는데 나의 첫 직관 콘서트였고 콘서트장에 있던 공기, 온도,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겨울에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걸었을 때
-> 아이들다운 귀여운 답변이다. 하지만 '없다.', '기억나지 않는다.'. '모르겠다.'라고 쓴 학생들도 꽤 있었다. 방어적인 아이들의 마음도 느낄 수 있었고,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2.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이 부럽지 않고, 기억하는 능력만큼이나 잊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저자의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동의한다. 모든 것을 기억하기엔 세상엔 즐거운 일만 있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내 진로인 미술디자인 쪽에서 생각해본다면 세계 2차 대전 당시에 끔찍한 기억들을 작품으로 표현한 피카소의 '게르니카-여인들의 전쟁'이라는 그림이 있다. 이 작품은 전쟁의 공포와 잔혹성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다. (중략) 게르니카의 여인의 눈물은 참 사실적이다. 하지만 이 그림을 본 게르니카 사람들은 어땠을까. 그 당시에 참혹했던 도시의 피비린내를 잊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이렇게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건 저주라 생각한다. 자신의 아픈 기억들은 잊을 수 있다면 잊는 게 좋을 것 같다 생각한다.
나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정말 재밌게 본 애청자인데 보면서 우영우의 능력이 부러웠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안 좋은 일을 겪었을 때 잊지 못한다는 건 불행하고 힘들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에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어느 정도는 인정하지만, 그래도 기억하는 능력>>잊는 능력인 것 같다.
-> 구체적이고 우수한 답변부터 간단하지만 확고한 자기주장까지... 학생들의 답변은 참 다채로웠다.
13.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은 무엇인가?
TV를 켤 때 사용한 리모컨이 사라져서 뒤적거린 적, 핸드폰이 사라져 온 집안을 돌아다닌 적 있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많이 겪은 일이고 너무 내 이야기 같았기 때문에 가장 인상깊었다.
이때 '나는 리모콘을 냉장고 옆...' 이렇게 주의집중하는 사람은 없을 테죠. 그러면 리모콘을 냉장고 옆 테이블에 둔 기억은 아예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라는 구절.
-> 왜 항상 나는 내 주변에 놔둔 에어컨리모콘, 에어팟, 안경, 핸드폰을 찾지 못할까? 난 기억력이 안 좋을 걸까? 하고 매번 생각했었는데, 그냥 내가 부호화, 강화 과정을 거치지 않아 그런 거였구나~하는 깨달음(나의 기억력이 안 좋은 것이 아니라, 내가 애초에 저런 일에 대한 기억을 저장조차 하려 하지 않아서 그런 거였구나 하는 깨달음)을 느끼게 해준 구절이라 가장 인상깊다.
->학생들이 자기 일상과 관련된 글 내용에 흥미를 많이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활동을 할 때 유념해야 하는 것이 있다. 학생들이 글 읽는 것을 포기하지 않도록 적절한 난이도의 글을 선정해야 한다. 더불어, 가능하다면 학생들의 일상이나 관심사와 관련 있는 주제를 선정해야 한다!^^
앞으로 꾸준히 좋은 글을 수집해 수업 활동에 활용하도록 노력해야지...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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